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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8-24 18:07
한중관계, DJ의 찬란한 유산
 글쓴이 : 거미군
조회 : 2,500   추천 : 0   비추천 : 0  

2009년 8월 18일,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묵묵히 짊어지고 민주주의와 남북화해의 새 시대를 연 김대중 전대통령이 서거했다.

인동초… 55회에 이르는 가택 연금과 6년간의 투옥, 암살 위협과 사형 선고로 얼룩졌던 김 전 대통령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고인이 집권했던 시기 대한민국은 IMF 경제위기라는 건국 이래 최대 국난 속에서 국민이 땀 흘려 이룩한 국제위상마저 곤두박질치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난날 한 평짜리 감옥에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적었던 국가발전의 구상들이 하나씩 대한민국의 커다란 밑그림이 돼갔다. 정부에서 올라온 두꺼운 보고서들엔 밤 세워 고민한 지시와 주석들이 빨갛게 도배가 됐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은 그렇게 국민의 삶 속에 뿌리내렸다.

대통령 재임 시절 고인이 이룩한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 것은 물론 이 땅에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켰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화해협력의 기틀을 다졌다. 건강보험 통합과 기초생활 보장으로 복지국가의 근간을 마련했다. IT강국 코리아도 고인의 안배가 깃들어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한중관계의 재설정을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이정표를 세운 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시절부터 중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심지어 퇴임 후에도 중국과의 관계 발전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무엇이 고인으로 하여금 한중관계를 중시하도록 만들었을까? 

DJ의 찬란한 유산 1.jpg
 - 김 전 대통령 서거 대서특필한 중국신문 (광저우일보)


 한중 동반자 관계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에 이바지

1997년 이전까지만 해도 동북아 질서는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형국이었다. 중국이 비록 개혁개방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블록(미국-일본-한국-타이완)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선 이러한 교착상태를 깰 수 있는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중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었다. 1998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장쩌민 주석, 주룽지 총리와 만나 한중관계를 ‘협력 동반자 관계’로 끌어올린다. 이것은 미국 주도의 동북아 질서에 비춰 볼 때 변화의 전주곡을 의미했다.

단순히 한중 쌍방의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전통적 우호협력 국가이며 식량 및 에너지 공급원인 중국과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대북 영향력이 그만큼 확대된다는 뜻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선언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전기를 마련한 데는 일관된 햇볕정책과 함께 중국의 도움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다. 남과 북 모두의 동반자로서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중국은 비로소 미국과 함께 동북아 질서의 양대 축으로 자리매김 할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중국 정부와 언론이 일제히 김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하고, 중국 인터넷에 고인에 대한 추모 열기가 높은 것은 이처럼 그가 중국에 남긴 ‘유산’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닦은 한중 동반자 관계의 초석은 외교안보를 넘어 경제와 문화 방면으로 번져갔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국내 전자, 자동차 제품이 중국 시장을 노크했다. 중국 동남 연안을 중심으로 한국계 기업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IMF 이후 빈사상태에 처한 한국경제는 중국과의 교역증대라는 영양분에 힘입어 다시 기력을 되찾았다.

1990년대 후반 중국에 일기 시작한 한류열풍도 깊어진 한중관계가 아니었다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을 것이다. 당시 “별은 내 가슴에” 등 한류의 선구적 드라마들이 중국의 안방극장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건 중국 정부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미디어를 총괄하는 기구인 광전총국이 황금시간대 방영을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국에 뿌리를 내린 한류는 사회주의 색채를 갓 벗어났으되 아직 현대적인 문화산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절묘한 타이밍의 공백지대를 질주했다. 한국문화에 대한 선호현상은  자연스레 한국제품에 대한 좋은 이미지로 이어졌다. 이후 우리나라의 대중국 수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03년 이후엔 전체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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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거 직전,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 시진핑 부주석(오른쪽 세번째)을 만난 DJ 


서거 직전에도 중국 차세대 지도자 만나 동반자 역할 당부 
 
한중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룩한 ‘협력 동반자 관계’를 발판 삼아 2003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 2008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거듭 진화한다. 지구촌 어디를 둘러봐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토록 놀라운 관계 발전을 이룬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애초 김 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질서라는 큰 구도 속에서 치밀하게 설계한 까닭이다.

한중관계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착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중단 없이 이어졌다. 서거 직전인 2009년 5월 김 전 대통령은 1주일에 세 차례나 투석을 받아야 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중국에 다녀왔다. 중국 외교부 산하 인민외교학회 초청이었지만 실상은 시진핑 국가부주석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시진핑 부주석은 후진타오 주석을 잇는 차세대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중국의 미래 지도자에게 “북핵 6자회담, 한반도 비핵화, 남북통일 문제에 있어 큰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시 부주석에게서 “남북 공동의 친구로서 화해협력의 건설적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쩌면 이때부터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역사적 소임을 놓지 않았다. 때문에 고인의 삶이 전하는 깊은 울림은 대한민국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난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 중국 외교부는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이며, 중-한 관계 발전을 위해 중요한 공헌을 했다. 중국 정부와 인민은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떠났지만 고인의 정신은 국경을 넘어 대륙을 흔들고 이역만리 퍼져나갈 것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세계인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끝)
 
- 2009년 8월 21일 블로그언론 Post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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